프롤로그
현재, 늦은 가을
서린은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레드카펫 위에 섰다. 그녀는 취재진의 열띤 경쟁에 기분 좋은 미소를 보낸다. 그녀의 미소는 ‘심장을 떨리게 하는 마법이다’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청초하고 아름답다.
”지금 막 김상욱 감독의 히로인, 한 서린 씨가 도착했습니다!“
”한 서린 씨는 올여름 ‘지중해의 연인’으로 브라운관을 뜨겁게 달군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서린 씨! 이쪽도 한번 봐주시죠! 하트 한번 부탁드립니다!“
서린은 취재진의 요구에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모두 응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 ‘한 서린’은 이 별들의 축제에서 단연 돋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팬들 한 명 한 명과 악수하며 영화제가 열리는 대공연장의 본당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많이 웃지 마. 주름 생겨!”
“동선이 복잡해지니까 힘들어서 그러는 거지?”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서린의 매니저인 지윤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손보고 있다. 그러면서 연신 잔소리해댄다. 서린은 유일한 친구인 지윤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이 답답한 상황에 한숨만 내쉰다.
“뭘 일일이 다 상대하냐. 아침에 방울토마토 한알 먹었으면서.”
“힘들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지윤은 서린이 힘이 들어 한숨을 내쉰 것으로 오해했다.
“이러니까 좀 사람 같지 않아?”
“두 번만 사람 같았다간 나 잡겠네. 너 점점 이상해.”
지윤의 말이 맞다. 예전의 서린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스타였고 일반 대중들과 소통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과거에서 살아 돌아온 그녀는 더 이상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다. 서린은 다시 한번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지윤을 향해 웃었다.
“언니! 너무 예뻐요! 여기 좀 봐주세요!”
“한 서린 씨! 팬입니다! 파이팅!”
아주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실버 스틸레토 힐을 신은 서린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바이올렛 색상의 시스루 원피스 소매 프릴이 우아하게 물결쳤다. 바로 그때,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인터뷰했던 한 연예 프로그램의 리포터가 그녀를 힘주어 불렀다.
“한 서린 씨!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서린은 가지런한 긴 생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돌아섰다. 굴욕 사진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몸가짐을 조심해온 그녀에겐 익숙한 몸짓이다. 리포터 뒤에 선 카메라맨의 손엔 LIVE 피켓을 단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생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서린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그들을 맞는다.
“안녕하세요. 한 서린 입니다.”
서린은 카메라를 향해 양손을 흔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그녀는 리포터가 어떤 질문을 했었는지 대강 기억났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일생 처음 약혼발표 한 날을 잊기란 어려울 것이다.
”오늘 서린 씨의 연인, 배 신우 씨도 이 자리에 오시나요?“
서린의 기억은 정확했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리포터와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네. 그럼요. 같은 소속사 식구니까요.“
더 달콤한 대답을 기대했을 리포터의 표정이 묘해졌다.
”오늘 여,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유력한 후보가... 여자친구인 한 서린 씨인데 너무 뻔한 걸 여쭤봤나요? 요즘 배신우 씨의 헌신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계시잖아요. 기분이 어떠세요?“
”윤기주 리포터님?“
서린은 예전처럼 기뻐하며 냉큼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 리포터를 힘주어 불렀다.
”네, 네?“
리포터는 서린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란 눈치다. 서린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런 질문 실례되는 줄 알지만, 연애해본 적 있으세요?“
”네? 물론.....“
리포터는 생방송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서린에게 인터뷰 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의식조차 못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는 남자가, 세상에 있을까요?“
”글쎄요... 있지도 않을까요....?“”있을 수도 있겠죠. 아직 만나보지 못해서 그렇지.“
서린을 바라보는 리포터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사랑싸움한 모양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리포터는 다음 질문을 어떻게 이어갈지, 대충 시나리오를 짜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쓸 수 없는 대본이다.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인터뷰에 쩔쩔매는 것이 훤히 보여 아주 잠깐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그... 하지만 배 신우 씨처럼 스윗한 연인이라면 서린 씨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스윗의 대명사이시니, 그럴 수도요.“
서린의 냉소적인 대답을 회피하며 리포터는 순발력 있게 다음 질문을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두 분 결혼 발표는 언제쯤 하시나요? 아시겠지만 어제 배신우 씨는 인터뷰에서 최고의 아내감으로 한 서린 씨를 언급했거든요.“
그랬다. 그 말에 연애 초기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신우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 영화제에 참석했던 서린은 만천하에 그와의 약혼을 선언했다. 그녀는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인 남자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결혼이요? 글쎄요.“
서린과 신우의 약혼 발표 기사가 나간 뒤 그와 관련된 주식 종목들이 일제히 폭등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신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러브콜을 많이 받는 남자배우가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시간이 왔다. 배신우는 한 서림의 순수한 사랑을 저버린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만 한다.
”아... 아직 결혼계획은 세우지 못했다... 뭐, 이렇게 해석하면 될까요?“
리포터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인터뷰에 쩔쩔매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이 자리에서 세상 가장 달콤한 프러포즈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 또한 그런 꿈을 품은 적이 있었다.
”결혼은 신중해야죠.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서린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자신감에 찬 그 미소에는 아역부터 시작해 스타로만 살아온 서린이 대중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차가움이 실려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배 신우. 나없이 네가 얼마나 무능력한 인간인지, 어디 한번 처절하게 깨달아봐!’
서린의 마지막 쐐기에 뒷말을 잇지 못하던 리포터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구세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저, 저기! 하 지혁 씨가 오시네요!”
어느새 그들의 아름다운 구세주가 레드카펫 위에 올라섰다. 밴에서 내릴 때부터 남다른 오라를 풍기던 장신의 사내는 위압감이 남다른 다부진 어깨 실루엣이 돋보였다. 모델 출신답게 어슬렁거리며 느슨하게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힘이 느껴졌다.
서린을 향해 고정된 먹빛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켜낼 듯 다급하고 위태롭게 빛나고 있었다. 마침내 그, 지혁이 도착하자 라이징 스타답게 구름떼같은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너무 늦었지?“
지혁의 다정한 물음에 주위가 일순 고요에 휩싸인다. 서린은 아니라는 듯 그를 올려다보며 가볍게 고개 저었다. 그리고 화사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순간, 더 가까이 다가선 그의 체취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견뎌냈다.
”하 지혁 씨! 역시 같은 소속사 식구 챙기러 오신 건가요?“
”네. 그렇기도 하고, 존경하는 선배이자 아끼는 동생입니다.“
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서린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커다란 손이 와 닿자 그 열기는 가녀린 맨 어깨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녀는 뜨거운 체온에 움찔했으나 내색 할 수 없었다.
”동생...이요? 평소 하지혁 씨는 한 서린 씨에게 깍듯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일 쪽으론 선배지만 개인적으론 친한 동생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지혁은 아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단둘이 있을 때 그의 높임말이 얼마나 숨 막히는지 안다면 저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제가 지혁 오빠께 영화제 초대권도 직접드린걸요.”
”그, 그러시군요! 그..... 두 분은 드라마 ‘지중해의 연인‘에 함께 출연하시면서 두터운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이네요. 하하하!“
리포터는 연인처럼 다정한 서린과 지혁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임기응변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저기 궁금해하시는 배 신우 씨가 오고 있네요.“
서린은 리포터 보란 듯 손가락을 펼쳐 이쪽으로 걸어오는 신우를 가리켰다. 그는 와인 컬러에 골든 도트로 요란한 장식이 들어간 슈트 차림이다. 마치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인 양 의기양양한 걸음걸이가 볼만하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잘나 보이던 얼굴은 이제 가식덩어리로만 보였다.
”안녕하세요?! 하 지혁, 여기서 본다?“
신우는 지혁의 등장에 내심 놀란 것 같지만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의 무시에 가까운 반응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 눈엔 선배 앞에서 쑥스러워하는 후배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서린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몸을 잔뜩 구부려 그녀에게 속삭였다.
“긴장도 체질인가?”
“그, 그런게 아니라...”
“저딴 자식 앞에서 약한 꼴 보이지마.”
지혁의 말에 서린은 흠칫 놀랐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신우 앞에서 늘 긴장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여어! 내가 여기에 서면 될까?”
신우는 딱 붙어선 두 사람이 못마땅했는지 그들 사이로 파고들어 가운데에 섰다. 그리곤 서린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분명 지혁을 경계한 몸짓이었다. 서린은 치 떨리는 감정을 억누르고 그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제 나도 왔으니 인터뷰 계속해볼까요?“
”아, 네! 그럼.....!“
”우리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서린은 인터뷰를 이어가려는 리포터의 말을 막아섰다. 신우는 자신만만하게 예상하고 있을것이다. 앞선 그의 인터뷰에 감격한 그녀가 약혼을 입에 올릴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서린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인터뷰 막 끝났어요. 이제 본식에 참석해야죠.“
신우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본다. 서린은 천진한 미소로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못 들은 말이 뭐 있었을 것 같기도 한데?“
자기 면전에서 프러포즈라도 해줬으면 하는 얼굴이 볼만하다. 서린은 발끝을 들어 올려 수줍게 웃으며 신우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건, 영화제 끝나고 집에 가서 봐요. 인터뷰 내용.“
서린을 내려다보는 신우의 불퉁했던 얼굴 위로 그새 화색이 돌았다. 서린은 마주 웃어 보이며 신우 옆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지도, 동조하지 않는 묘하게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서린은 리포터와 군중이 서 있는 쪽으로 서서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왠지 모르게 자신을 힐난하는 것 같은 표정에 서린의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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